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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강해)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고후 13:1~10, 창 38:1~26))
글쓴이 : 하나님의꿈     날짜 : 19-09-14 13:06     조회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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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되기 프로젝트


하나님은 우리를 변호하는 증인이십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예수의 증인이 되고 우리의 삶을 변호할 수 있는 ‘또 다른 증인들’을 세워나가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복종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의 증인이 되어서 ‘하나님이 옳다’고 말 하고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배고파하셨고, 우셨고, 분노하셨고, 고통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복종의 태도와 순종의 행위로 사는 그리스도였습니다. 말씀대로 사셨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만약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5절의 말씀은 예수님을 ‘충성된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누구의 증인이 된 것일까요? 예수님은 사탄(대적자)과의 전쟁을 하고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증인이 됩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사탄은 거짓과 분열로 하나님을 떠나 어두운 곳으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존재, 영적인 실체인 사탄이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진실과 영의 예배와 경배를 받기 위해서 찬양하는 ‘천사장’을 가장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자만이 자원하고 자발적인 예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자유로운 영’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세상에서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심판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공정한 심판을 위해서 증인들을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자기기준으로 마음대로 수정하고 변경하고 고쳐서 자신을 반역하는 자를 심판하시길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옳고 사탄은 틀리다’라고 부르짖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모여지길 원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이란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증인되기 프로젝트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삶은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예수님의 인생이 옳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증인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공의 노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얽매이게 하는 남자의 머리아래 있는 여자도 안 됩니다. 하지만 자유롭게 하는 남편의 여자는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자유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안에 들어가면 자유자가 되고 독립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남편, 율법의 남편은 우리를 얽매이게 하고 발목을 잡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남편 예수 그리스도, 은혜의 남편은 우리를 가장 독립자로 인정하고 최고의 배우자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누구의 여자가 되는가가 중요합니다. 부모의 권위 아래 있는 미성년자도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면 보고 듣고 전할 수 있는 증인이 됩니다. 도덕과 율법의 권위 아래에서도 진리의 자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유자와 독립된 사람만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죄에서 떠나서, 죽음에서 떠나서, 쾌락을 떠나서 세상을 다스리고 충만할 수 있는 자유자, 독립자가 증인이 됩니다.

예수 안에서 자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증언할 두세 사람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에서 두세 증인의 입을 통해 확정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세우기 위해 변명하고 권면하고 명령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이 편지가 개인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교회공동체를 변화시키고 회복하는 역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적인 것들이 예수의 증인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바라고, 개인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언약의 법이 되기를 바라고, 그때그때 잠시 처방하는 처세술이 아니라 회전하는 그림자조차 없으신 영원한 진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두세 증인으로 확정하겠노라’ 는 말은 신앙을 객관화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개인의 경험은 진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수결이 진리가 아닙니다. 상식과 사실이 진리가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는 신비도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상황말씀이 객관화되는 진리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아는 것’(고후 12:5)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아는 것은 ‘예수만이 옳다’, ‘예수의 삶이 진짜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곧 우리의 인생이다’, ‘예수로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변명하고 설명하면서 고린도교회를 가르치고, 때로는 권면하며 가르친 것을 지키게 하고, 또 몸으로 살라고 명령하는 그 모든 것은 나의 입장과 견해를 떠나서 육체로 오신 예수의 삶을 드러내는 신앙의 객관화입니다. 예수의 삶이 드러난다는 것은 나로 인해 생명의 빛이 드러나 다른 생명을 살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는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후 13:7)

예수가 옳다는 것이 나를 통해 드러나야 하고 또 나를 넘어서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통해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나는 악이라고 불릴지라도 너희를 선하게 세우는 것’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신앙의 객관화입니다. 고린도후서는 개인의 편지입니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진리의 편지,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심으로 가장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자가 된 청소부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소한 일처럼 보이는 ‘청소’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 Mission이라고 고백하니까 죽지 못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 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를 ‘성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후 13:2)

예수가 옳다고 고백하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세 가지 부탁을 합니다. 첫 번째는 생명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지만, 죄와 사망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죽은 것을 살리는 회생, 부활이고 빼앗긴 것을 다시 찾는 회복이고, 타락한 것을 되돌리는 회심입니다. 죄와의 싸움은 피흘리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죄와 타협하지 않고 작은 틈이라도 용납하지 않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살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살피고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두세 증인의 입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다 헛수고가 되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됩니다. 불을 통과하지 못하는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지어진 거짓 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고후 13:9)

세 번째는 온전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예수의 흔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교회는 ‘예수가 옳다’고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흔적이 고린도교회를 강하게 하고 온전하게 세워나갈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 그 약함을 통해 강해지고 그 강함을 가지고 증인이 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주여, 죽여주시옵소서!


‘우리가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후 13:7)

버림받은 자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예수의 삶은 내어주고 버림받은 삶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가 맞는다고 고백하고 있다면 누군가를 위해서 나도 내어주는 자, 버림받은 자가 되어야 신앙의 객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고 죽는 것이 아니고 죽고 사는 것입니다.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죽은 사람인가요? 영생은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나를 넘어서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예수가 옳다고 증언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내가 고백하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죽었다고 말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죽은 것입니다.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저 사람, 자기 욕망과 욕구대로 살려고 발버둥 치면서 자기가 죽었다고 하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자기는 죽지 않은 것으로 알고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경우도 이상한 것입니다.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계속 교회에 가서 ‘주여, 죽여주시옵소서. 죽여주시옵소서.’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같습니다. 이제는 주님과 함께 살아야 되는데 계속 또 죽여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개인의 편지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한 생명을 살리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편지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하는 앎이, 지식이 있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법


창세기 38장은 유다와 다말의 스캔들입니다. 듣기에 민망한 19금 이야기입니다. 장모님이랑 차를 타고 가면서 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장모님께서 성경에 왜 이런 말씀이 들어갔는지 모르겠다고 한마디 하셨습니다. 사위하고 장모님 둘이 듣기에는 굉장히 민망한 이야기였습니다. 21세기의 독자들에게도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이야기라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12족속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유다 만족에게 육적인 장자권을 주셨습니다. 그 민족의 첫 번째 조상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윗왕가의 이야기이고 마태복음 1장으로 보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조상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이야기를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니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방여인으로 시아버지를 유혹하고 자식을 둔 다말이 오히려 예수님의 조상으로, 떳떳하고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와 다말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관계를 통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유다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창 38:26)

이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그것은 옳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유다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말했을까요? 뒤에 보면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25장 5절부터 10절에 있는 ‘형사취수제’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는 창세기의 이야기이고 신명기는 500년 뒤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성문법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말과 말로 서로 합의하고 지키는 생활법, 생존법, 생명법이었습니다. 그 법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보는 공동체를 위한 법입니다. 지금은 여자가 더 소득이 많은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여자 경제생활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보호자가 없는 여자는 이삭줍기를 해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은 이스라엘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는 계대의 법입니다. 생명을 계속 이어가게 하기 위해 하는 법인 것입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법이지만 그 법의 정신은 살아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해석이 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그 정신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고, 증인이 되라고, 계대를 이어서 생명으로 충만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확증하는 증인들


다말의 행동이 옳은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행동은 더 옳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다말에게 ‘그는 나보다 옳도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유다는 피붙이가 죽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복잡한 상황을 다 내팽개치고 방관하며 자포자기했습니다. 계대가 끊기게 되었다는 심각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자식이 죽고, 아내도 죽고, 사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쾌락에 빠져 자신의 몸을 겨우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다릅니다. 유다 자손의 대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고 자기 남편의 명예와 권리를 찾는 것이 자신의 목숨보다 자기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자신의 몸을 창녀처럼 내어주더라도 하나님의 생명과 그 생명의 계대를 이어받을 모략을 짭니다. 다말이 요구한 것은 돈도 아니고 쾌락도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자신의 명예보다 남편의 집안의 생명과 명예가 더 소중했습니다.

다말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 명예와 품위를 상징하는 것이 다말이 받은 도장과 끈과 소유주의 표시가 새겨진 지팡이입니다. 이 세 가지가 다말의 증거품입니다. 돈이 아니고 명예입니다. 다말은 인생의 노예가 아니고 주인입니다. 창녀가 아니고 그 집안을 바로 세우는 진정 현숙한 여인입니다. 이방인이고 여자이고 스캔들이 있는 지극히 작은 자이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다말을 동여매는 사랑의 끈이 있고, 도장같이 찍어준 지울 수 없는 사랑이 있고, 날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의 지팡이 같은 안위하시는 사랑의 증표가 있습니다. 이 증표가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인생에 이런 증표들이 있어야 내가 살고 마지막 심판대에서 하나님의 승리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말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처럼 자신을 모두 내어준 인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시고 나의 신앙을 확증할 수 있는 증인들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증인은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못 자국과 창끝에 찔린 자국에서 흘린 피로 우리가 깨끗해지고 거룩해지고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고백이 되고 간증이 되고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증인 공동체


증인은 독립자, 자유자이어야만 될 수 있습니다. 주인에게 속한 노예는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죄의 노예, 인생의 노예, 돈의 노예, 자기 삶의 계획의 노예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유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구약으로 얘기하면 여자는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남편이 그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자유자의 남편, 은혜의 남편 예수를 만나면 그 여자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의 권위 아래 있는 미성년자도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야지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증인은 참여자입니다. 듣고 보지 않았는데 증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듣고 순종해야 말씀이 실재가 됩니다. 순종은 말씀의 역사를 여는 문입니다. 자유자이지만 자신의 자유의지를 꺾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해야지만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희생이 필요하고 대가지불을 해야 하고 권리포기를 해야 하고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것이 영원해지고 일상의 삶이 비상한 삶이 되고 자연이 기적이 될 수 있습니다.

증인은 두세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으로는 안 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모의는 두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라는 것은 나를 빼면 한 사람입니다. 세 사람이 되면 어느새 관계 안에서 규칙이 필요하고 절차가 중요하고 복잡해진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증인이 아니라 두세 사람의 증인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는 싸움은 혼자의 싸움이지만 결국 그것이 많은 증인을 만들어가는 증인 공동체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이스라엘도 12족속이었고 예수님의 제자도 12명, 120명의 오순절 다락방의 교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500명의 증인이 있습니다. 또 마지막 때에 14만 4천 명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함께 보고 들은 사람들을 계속 불러 모아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힘들더라도 모이는 것이 역사이고 모이는 것이 능력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은 결국 증인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증인, 참여하는 증인, 불러 모으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아야지만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6, 마침
고린도후서 13:1~10, 창 38:1~26)

God bless 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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